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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8/04/04 Boubacar Traoré, 말리의 영혼을 노래하는 가수
  3. 2008/02/27 과거의 꼬뮨들
  4. 2008/02/25 꼬뮨의 크기

7월 9일

2009/07/09 16:52 from 꼬뮨
어제 ctj 를 만나서 막걸리집에서 많이 마셨다. 6시 50분 정도부터 붓고 마시기 시작했고, 11시 30분 정도에 술이 거나해서 집으로 비를 쫄딱 맞으면서 기어들어갔으니 5시간 정도 마신 건데, 9시 정도부터 동문이 합세하면서 더욱더 정신이 없어졌고, 이 형님도 혀가 꼬이기 시작했는데, 그동안 살아온 지난 이야기를 서로 좀 많이 했다.

신앙과 진보적 성향과 천규진 선생에 대한 존경이 마구 꼬인 머랄까, 김규항 적 삶의 답습이랄까 싶기도 하였는데, 난 이런 사람들이 목사가 되어서 잘 살았으면 좋겠다. 상주에 와서 마음내려놓을 사람 하나 만난 듯한 안도감과 함께 제법 취해서 집에 기분좋게 들어가서 씻고 일찍 잘 잤다.

비가 오는 날에는 방문자도 별로 없고 해서 사무실은 또 한가한데, 에어보드를 찬양하는 글을 몇건 읽어보다가 사고 말았다. 아마 이 낭비벽과 계획없음은 맞아죽어야 고쳐질 듯하다. 한달에 2만원이지만 그게 어디야. 이제 난 매일 저녁에 집에서 운동해서 몸짱이 될거임.

안정적인 소시민의 삶을 이어나갈 수는 있을 것 같은데, 외로움이 가슴을 저민다. 이 촌동네에 마음 나눌만한 친구도 몇 없고, 여자가 그립긴 하지만 뽀뽀다방에 커피를 시킬수는 없는 노릇이고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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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ubacar Traoré, 말리의 영혼을 노래하는 가수

 


사용자 삽입 이미지
Boubacar Traoré 1942년 말리의 kayes 에서 태어났다. 유명 가수이며 작곡자, 싱어송라이터이다. 그는 kar kar 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한데, 말리의 공용어인 bambara 어로 '드리블을 많이 하는 사람' 이라는 뜻이다. "축구를 할때 드리블을 하라며 친구들이 kari, kari 라고 나에게 소리를 질렀는데, 그것이 나의 이름처럼 되었다." 라고 그는 자서전에서 회고한다.

 

그는 1960년대 초반에 명성을 얻었다. 그는 기타를 독학해서 배웠으며 서양의 블루스 음악과 아랍의 음악, 서부 아프리카 mande 지역만의 독특한 5음계를 혼합한 독특한 스타일의 음악을 창시했다. 그는 말리의 슈퍼스타가 되었으며 서부 아프리카 신생독립국의 상징이 되었다. 그를 말리의 척 베리나 엘비스 프레슬리로 비유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그의 가장 유명한 노래인 'mali twist' 는 신생독립국 말리의 국가적 사명을 노래하고 있다.

 

모든 말리의 사람들이 아침마다 그의 노래를 들으면서 잠에서 깼으며, 그의 노래를 들으면서 농장에서 일을 했고, 저녁마다 그의 노래를 들으며 저녁식사를 하고 술을 마시고 춤을 추었다. 그의 노래는 정말 인기가 많았으며, 그는 정규적인 라디오 공연을 했다. 그러나 그는 녹음을 할 수 없었다. 음악가에게 주어지는 수입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매우 가난했으며 생계를 위해서 별도로 노동일을 해야만 했다. 그는 재봉사, 가게 점원, 소작농으로 일을 했지만 저녁마다 오케스트라에게 악기를 가르치고 친구들과 함께 라디오에서 노래를 불렀다.

 

1970년대가 되어서 Traoré 의 인기는 계속해서 사그라들었다. 1987년 텔레비전 방송이 시작되자 20년 만에 방송된 그의 음악은 열광적으로 재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그의 음악은 급격히 각광을 받기 시작했지만 1989년 아내 Pierrette 의 죽음으로 그는 비통함에 빠져서 말리를 떠나 과거 말리를 식민지로 다스렸던 프랑스로 이주했다. 그는 가난한 이주노동자로서 건설 현장에서 일을 하면서 6명의 자식을 키웠다. 그러나 그는 주말마다 가난한 아프리카 이민자들을 위해서 공연을 했다. 그때 영국의 레코드 프로듀서가 Traoré 의 라디오 공연 테이프 중 일부를 발견했고, 그를 찾아낸 영국인 프로듀서에 의해서 마침내 앨범 발매 계약을 맺게 되었다. 그의 첫 번째 앨범인 <mariama> 1990년에 발매 되었다. 그 이후로 Traoré 는 국제적인 인기를 구가했으며, 유럽과 아프리카, 북아메리카를 순방하면서 지속적인 공연을 했다.

그의 노래는 그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kayes 의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지냈던 사람들에 대한 추억과 사랑으로 가득차 있다. 주술사들이 철커덕거리는 옷을 입고 춤을 추던 사육제의 밤으로, 친구들과 뛰어놀던 넓은 들판의 아름다운 서정으로 그는 사람들을 데려간다.

 

 

그의 노래는 독립의 기쁨과 희망을 노래하면서 일당독재와 내전으로 혼란해진 말리의 현실을 슬픔으로 직시한다. 아내와 사랑하는 아이들의 죽음까지 숨기지 않는 그의 노래는 가슴 저미는 슬픔의 조용한 힘으로 가득차 있다.

 

그의 친구인 또다른 말리 출신의 슈퍼스타 Ali Farka Toure '만점이 별 5점이라면 난 kar kar 에게 별 10 점을 주겠다'고 했다.

 

그의 삶은 2001 Je chanterai pour toi ("난 당신을 위해 노래하겠소") 라는 영화로 제작되었으며 2005 DVD로 발매되었다.

 

그는 한 국가의 역사와 민중의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노래하는 강인한 의지의 예술가이다. 그의 호소력 넘치는 목소리와 소박하고 기교 없는 기타는 서부 아프리카에서 이주한 흑인들이 진정한 블루스의 원조라는 해묵은 사실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미국으로 건너간 블루스가 다시 서부 아프리카에서 그를 만나서 전통의 재창조로 피어난다.

 

1942년 출생

1960년 말리 독립 (18)

1960-1967년 말리 국내 활동 (18-25)

1987 20년만에 말리 국영 TV 출연 (45)

1989년 아내 사망, 프랑스 이주 (47)

1990년 첫 앨범 발매 (48)

2001년 영화 제작 (59)

2003년 베스트 앨범 발매 (61)

 

발매 앨범

 

Mariama (1990)

Kar Kar (1992)

Les Enfants de Pierrette (1995)

Sa Golo (1996)

Maciré (2000)

Je chanterai pour toi (2003)

The Best of Boubacar Traoré: The Bluesman from Mali (2003)

Kongo Magni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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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꼬뮨들

2008/02/27 13:14 from 꼬뮨
꼬뮨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구성원들을 먹여 살리는 활동이 될 것이다. 공동체의 구성원은 그 꼬뮨 안에서 안전하고 건강해야 하며, 이러한 기본적인 사항이 보장될 뿐만 아니라 행복을 느끼고 자아 발전을 위해서 노력할수 있는 여건을 보장해야 한다. 그리고 어떠한 것에 대한 종속도 최소한으로 유지되거나 철폐될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좋은 말이다. 누구나 꿈꾸는 내용들이다. 과거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이상향을 꿈꾸었다. 가장 대표적이고 유명한 것이 신동엽 시인의 <산문시1> 이다.


스칸디나비아라든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광부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묻은 책 아이덱거 럿셀 헤밍웨이 장자(莊子).

휴가여행 떠나는 국무총리
서울역 삼등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볕 흡쓰며 줄지어 서 있을 때
그걸 본 서울역장 기쁘시겠오라는 인사 한마디 남길 뿐
평화스러이 자기 사무실 문 열고 들어가더란다.

남해에서 북강까지 넘실대는 물결
동해에서 서해까지 팔랑대는 꽃밭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무지개빛 분수
이름은 잊었지만 뭐라군가 불리우는 그 중립국에선
하나에서 백까지가 다 대학 나온 농민들
추럭을 두대씩나 가지고 대리석 별장에서 산다지만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 이름 꽃 이름 지휘자 이름 극작가 이름은 훤하더란다.
 
애당초 어느쪽 패거리에도
총쏘는 야만엔 가담치 않기로 작정한 그 지성(知性)
그래서 어린이들은 사람 죽이는 시늉을 아니하고도
아름다운 놀이 꽃동산처럼 풍요로운 나라, 억만금을 준대도 싫었다.
 
자기네 포도밭은
사람 상처내는 미사일기지도 땡크기지도 들어올 수 없소
끝끝내 사나이나라 배짱지킨 국민들,
반도의 달밤
무너진 성터가의 입맞춤이며
푸짐한 타작소리 춤 사색뿐

하늘로 가는 길가엔
황토빛 노을 물든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병을 싣고
삼십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가더란다.

또는 자유로운 인간들의 공동체를 꿈꾸었던 칼 맑스가 유명하다. 현실 사회주의의 실험이 좋지 않은 성적표와 함께 실패로 끝난 지금 오로지 경쟁력과 이기심에 기초한 자본주의만이 승리했다고 보는 것은 섣부른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내부에서 자본주의에 기초하지 않은 삶을 상상하는 것은 아직도 가능하며,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전의 공상주의적 이상향을 꿈꾸었던 오웬, 푸리에, 생 시몽 등을 먼저 되짚어보며 꼬뮨 추구의 근거를 인간 고통의 이상 추구에서 찾고 싶은 욕심을 이기지 못했다.

로버트 오웬

오웬은 스코틀랜드 산중의 뉴 라나크 부락의 7층 공장에서 아동 노동 착취 해방과 교육, 11시간 이내 노동을 주장하면서 성공적인 공장 운영을 했다. 이 곳에서는 서로에 대한 규제와 강제가 아니라 자비심에 기초한 규율이 지켜졌으며, 정치적인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하고 서로에 대해서 개입할수 있었다.
자비심이 넘치는 부인네들은 공장에서 아무도 고통스럽게 살지 않는다는 사실에 고무받았고, 그러한 것에 개의치않는 냉혹한 공장주들조차 공장의 생산물이 매우 많고 번영한다는 사실을 인정할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현재의 유한 킴벌리가 공익기업으로 사회로부터 인정받는 것 이상의 결과를 가지고 있었다.
오웬은 공장을 인수한지 10여년만에 성공적인 경영인이 되어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에 대해서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찾아왔으나 오웬은 막상 자본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배당의 근거로서 인간의 이기심이 아닌 자비심을 강조했고, 화폐 폐지론을 주장했다.
오웬에게 있어서 뉴라나크의 공장은 인간의 이기심이 아닌 자비심이 이로운 공동체를 만들어나갈수 있다는 진리를 실험하는 하나의 실험이었다. 물론 실험은 대성공이었으므로 그는 전 세계로 자신의 공동체 양식을 확대하기를 원했다.

자본주의가 내포한 근본 모순에 의해서 생산 과잉과 대공황이 오자 사람들은 로버트 오웬의 의견을 듣기 위해서 몸이 달았다. 그러나 의원 총회에서 오웬이 내놓은 안은 자신이 운영하던 바와 같은 공장 개혁안이 아니라 생산적 빈곤을 의도적으로 유지하는 빈자 공동체로 전체 사회를 재구성하는데 있었다.

우리는 모두 그의 계획이 실패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가 남긴 유산이 영국 노동조합과 소비조합 운동으로 이어져서 영국 노동당의 근간에 편입되었고, 옥스팜과 같은 소비운동의 뿌리를 만들어 준 것은 부정할수 없다.

생각난 김에 문국현과 로버트 오웬

말하자면 그는 자본주의 성장기의 문국현이었다. 현대의 대중들은 그를 통해서 이상적 공동체의 실현을 목도했고, 그 확장을 꿈꾼다. 문국현이 직면한 것은 당시 자본가들과 학자들의 비아냥이 아닌 직업적 정치가들의 밥그릇 싸움판에 편입되기를 거부한 결과에 대한 댓가로서의 반대 급부이다. 그것이 창조한국당의 탈당론자들이 주장한 통합민주당에 몸을 내맡기는 것이 되면 안되겠지만, 문국현은 좀더 큰 그림에서 자신의 이상론을 구체화시키고, 정치적 합의를 통해서 구현할 밑그림을 짤 필요가 있다.

생 시몽

생 시몽은 낭만적이고 의협적이면서도 광기에 서린 귀족 출신의 철학자였다. 민주주의에 대해서 종교적 열망으로 들떠 있었으며 모든 것을 알고자 했으나 정작 자기 앞가림을 할줄 몰랐다. 젊은 시절에 프랑스 혁명에 투신하여 이후에는 모든 철학자, 과학자, 종교인 등을 집으로 초대하여 그들과 먹고 마시고 토론을 하면서 젊은 시절에 가지고 있던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말년에는 극도의 가난에 시달렸지만 그의 괴팍함에 질린 사람들은 아무도 그를 돕지 않았다. 그의 삶은 막장에 다다른 이후에도 2년이나 계속되었다.

......나를 구해 주십시오. 기아로 죽을 지경입니다. 15일간이나 빵과 물로 연명해 왔습니다……. 출판 비용 때문에 입고 있는 옷 외에는 모든 것을 다 팔아 버렸습니다. 내가 이 꼴이 된 것은 지식과 공공복리를 향한 열정, 전 유럽을 뒤덮고 있는 무서운 위기를 종결시킬 평화적인 방법을 찾으려는 희망 때문이었습니다…….
(별로 도와 주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죽은 이후에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기괴한 종파가 생겨났다. 제자들은 사람이 서로에게 의존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혼자서 입을수도 벗을수도 없는 파란 옷을 입고 다녔다. 이후에 프랑스와 독일, 영국에 있던 생 시몽 교파의 교회는 의례주의로 타락하였다. 지금의 눈으로 보면 극히 우습지만 당시 이들의 복음은 '인간은 일하여야 한다.' 라는 것이었다. 다양한 종류의 노동자가 가치를 창조하며 이들이 가장 많은 가치를 받을 권리가 있지만 이상하게도 이들은 그만큼의 댓가를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노동 과정과 노동의 결과물을 노동자에게 주려는 이 야심찬 시도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이 밝혀지기 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생 시몽의 사제들은 막연한 사회 비판에 기초해서 고개를 끄덕끄덕하는 이들의 '그러면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합니까?' 라는 질문에도 대답할수가 없었던 것이다.

샤를 푸리에

생 시몽이 위대한 사회 비판에 종속되어 있었다면, 푸리에는 사소한 것에 천착해 있었다. 푸리에의 삶 자체도 그의 사상처럼 사소하였는데, 평생 정원과 고양이를 좋아한 소상인이었다. 말년에 그는 허경영처럼 자신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유명한 이들에게 보냈다.

지구는 상향선 4만 년, 하향선 4만 년 계 8만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양 기간 동안에 행복의 절정 8천 년이 존재한다. 우리는 혼란, 만행, 족장제, 미개를 통해서 전진하여 온 발전의 8개 계급 중 제5계단에서 살고 있다. 이제부터는 보장시대가 시작하며, 그 다음에는 조화의 상향선이 놓여 있다. 완전한 행복에 도달한 후에 이 상하운동이 반전하여 모든 계단을 통해서 처음으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조화시대를 더 깊이 파고들어 가면 새로운 사태가 발전하여 나온다. 북방 왕관은 고요한 이슬 빛을 머금고 북극을 중심으로 싸고돌고, 바다는 레모네이드가 되며, 낡고 고독한 위성 대신에 6개의 새로운 달이 지구를 돌고, 조화에 더 알맞은 새로운 종류 - 순하고 일 잘하는 반(反) 라이온, 배를 끌고 다닐 반(反) 고래, 반(反) 곰, 반(反) 빈대, 반(反) 쥐 등 - 가 등장할 것이다. 인간은 144세나 살 수 있으며, 그중 120년간은 제한 없는 성적 향락을 누릴 것이다. 다른 유성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그러나 그는 오웬과 마찬가지로 오웬의 협동농장과 그리 다르지 않은 일종의 큰 건물의 공동체를 주장하였다. 중심건물, 농장과 공업시설이 배치된 그곳에서 모두가 호주머니 사정이 허락하는 대로 어디든지 가장 좋아하는 곳에 자리 잡고 살 수 있으며 원하는 대로 개인 생활을 한다. 문화 생활을 펼칠 수 있을 정도로 잘 혼합된 생활을 한다. 특히 그는 중앙 집중을 통한 능률 올리기를 위해서 공동 취사장의 효율성을 강조했다.

누구나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하루에 몇 시간씩 노동하지만, 각자가 제일 좋아하는 일을 하므로 누구도 꾀부리는 일이 없어진다. 그러면 더러운 일은 누가 할까? 어린아이들이 할 것이다. 도살장에서 일하는 것을 좋아하거나 혹은 도로 수리를 기뻐하거나 쓰레기 치우는 일을 하고 싶어하는 아이들이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더러운 일을 싫어하는 아이들은 꽃을 가꾸고 부모들의 틀린 발음법을 고치는 일을 할 수 있다. 모든 노동자들은 누가 일을 잘하는지 서로 경쟁하게 된다. 배 재배자들 혹은 시금치 경작자들이 서로 경쟁하고, 오믈렛 요리인들과 샴페인 주조자들이 일대 경쟁을 하게 된다.

전체적으로 얻는 이익은 막대할 것이며 이득이 30%까지도 도달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촌락 전체에 대한 것이며, 이것은 다시 12분의 5는 노동자에게, 12분의 4는 자본에, 12분의 3은 능력에 분배된다. 모든 사람들은 노동자일 뿐만 아니라 부분 소유자가 되도록 종용한다.

이상하고 환상적인 것같이 보이지만 푸리에의 사상은 미국에서 뿌리를 박았다. 한때에는 미국 내의 화란스테르 공산촌의 수가 40개 이상에 달했고, 오웬파 부족과 기타 각종 종교운동집단을 합하면 각각 15명에서 900명의 회원으로 된 유토피아 집단은 최소한 178개에 달했다.

그들은 가지각색이어서 어떤 것은 종교적인데, 어떤 것은 반종교적이고, 순결적인 것이 있는가 하면 음탕한 것도 있고, 자본주의적인 것, 무정부주의적인 것도 있었다. 오하이오에는 트품벨화랑스, 롱아일랜드에 모던 타임스, 그 밖에 오네이다, 부룩함, 뉴이카리아 등이 이름났고, 1843년에서부터 1855년까지 지속하였고 1930년대까지도 반(半) 호텔 반(半) 공동체로 남아 온 뉴저지의 노드 아메리칸 화랑스는 특히 유명하다.

그러나 오늘날 이 꿈같은 공동체들은 그 무엇도 남아있지 않다. 푸리에의 화란스테르 공산촌만큼 현실로부터 유리된 것은 없었다.

인간은 과거의 꿈에서 미래를 밀어낸다

그러나 과거의 이상주의적 공동체의 실험이 모두 실패로 끝났다고 해서 그것들이 무의미하지는 않다. 그들의 사회 진단과 비판은 정확했지만 그들의 처방은 모두 조금씩 달랐다. 그리고 어느 것도 성공하지 못했다. 푸리에의 주장은 너무나도 황당해서 당시 맑스가 이를 비판할 정도로 주목했다는 것 자체가 기이한 일이다.

그러나 현재에서 탈락한 자들이 꾸는 꿈이 지금의 세상을 만들어왔다고 하면 비약일까? 세계는 그 내재한 모순으로 인하여 자기 위기를 끝없이 만들어낸다. 그러나 그러한 위기는 꿈을 꾸는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어 꾸준히 극복될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그러한 움직임이 더욱 더 아래에서 일어나고 실질적으로 검증받고 실험되면서 역사는 발전해 온 것이다.

꼬뮨을 현재적으로 재구성하는 시도는 지금도 꾸준히 일어나고 있다. 수유+너머의 고병권 대표는 '다양한 존재들의 자유로운 협력과 소통을 발명하려는 이론적·실천적 노력'으로서 꼬뮨주의를 주장한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대중의 실체를 꼬뮨의 근간으로 파악가능한 역학적인 존재로 본다. 특정한 존재하는 실체로서 조작 가능하던 대중을 유기적인 흐름으로서 통합적으로 파악한다. 이러한 흐름 내에서 대중이 혁명의 주체가 될수 있다는 것은 대중을 파시즘의 주체로 보는 것과 마찬가지 맥락에서 가능한 것이다. 박정수도 고병권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내에서 태어나서 자본주의 근본 자체를 부정하고 자본주의가 아닌 것을 욕망하고 만들어낼수 있는 사람들의 탈 자본주의 욕망을 긍정한다.

그 과정에서 그러한 실천을 해나가기 위해서는 꼬뮨이 필요하다. 타인을 설득하고 공명하면서 공동의 작업을 만들어나가고 그것이 서로 얽혀서 공동의 가치를 창출해나가는 기본적인 관계 속에서 혁명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기실 이러한 활동은 매우 기본적인 인간의 활동이며, 자본주의 사회의 일상이다. 그러나 이것이 혁명의 단초가 될수 있는 이유는 그 출발이 자본의 요구에 따른 수동적 욕구가 아닌, 자신 존재의 근원에서 생겨난 날 것의 강렬한 욕망에서 출발한다는 것에 있다. 이 야성의 날 욕망은 "돈이 있어야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할 수 있으니 돈이 있어야 해. 내가 돈을 벌려면..." 과 같은 식으로 계산하고 따지지 않는다.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문명화되고 약아빠진 나의 욕구는 사실 자본의 요구와 국가의 필요에 따라 정제되고 걸러진 찌꺼기 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그것이 사실 내가 바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나의 일상과 나의 감정이 증명한다. 부모와 사회와 자본의 요구에 충실하게 살아가고 있는데 공허하고 허탈한 느낌이 일상을 지배하는 회색의 도시에서 벗어나서 공동체를 만들어나가는 공통의 욕망을 모여서 실천해야 한다.

그래서 꼬뮨이란 것은 그러한 혁명의 물적 토대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으로서 파악된다. 예를 하나 들자면 헤비타트 운동이 있다. 이 운동에 참가한 사람들은 좌파가 아니고, 진보적이지도 않지만 그들이 하는 행동은 이기심과 이윤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집을 지어 준다는 행위에서 이들은 자발적인 노동을 선택하고, 어떤 보수도 없이 행복감을 느낀다. 이것이 공동의 자산을 창출해내는 공동체적 행위로 변화할수 있는 체제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이것은 명백한 단기 자원봉사이기 때문에 행복과 추억을 남기고 다시 자본주의적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자발과 자율에서 출발한 노동으로 사회 공동의 자산을 창조하는 범위의 꼬뮨에 대해서는 좀더 자세히 알아보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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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뮨의 크기

2008/02/25 20:50 from 꼬뮨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그래서 혼자 살면 외롭다. 후손을 남기기도 애로사항이 많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동물들처럼 고독을 즐기다가 쿨하게 관계를 맺고 헤어지고 새끼를 키우다가 독립시키는 개인으로 이루어진 사회를 구성하지도 못한다. 혼자 존재하는 인간은 무능하고 약하다.

인간을 그렇게 떼로 모여서 살기 시작했다. 그런데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인간은 강해졌다. 모여 있는 두명은 따로 있는 두명보다 세고, 모여 있는 천명은 따로 있는 천명보다 천배 이상 세다. 인간은 그렇게 모여서 힘이 세졌고, 많아졌기 때문에 지구를 정복했다. 이제 인간이 너무 많아서 지구가 몸살을 앓는다. 땅 속 깊숙이 박혀있던 기름과 석탄을 파내고, 태워서 자기 좋은 일에 쓰고, 그 연기로 인해서 지구는 점점 뜨거워지고 있다.

인간들이 많이 모이면 슬픈 인간들도 더 많아진다. 인간은 사회를 만들었고, 사회는 계급을 만들었고, 계급은 착취를 만들었다. 착취당하는 인간은 슬프다. 착취하는 인간이라고 해서 딱히 즐거울리는 없다. 원래 인간이 착취와 피착취의 구조를 내재한 존재는 아니다. 그런데 착취하게 되었다. 구슬르거나 을러서 뺏고, 모으면 효율적이다. 한 인간이 만들어낼수 없는 많은 것을 다수가 모이면 다수가 누릴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슬픈 인간은 끝없이 생겨난다. 그래서 사회와 이데올로기의 굴레를 벗어나서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적당히 모일 필요가 있다. 그것을 다른 말로 꼬뮨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예로부터 꼬뮨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꼬뮨이 너무 적으면 무능하고, 너무 많이 모이면 슬퍼진다. 배고프고 서럽게 울면서 살기 위해서 모인 것이 아닌데, 사람이 모임 곳에서는 꼭 어렵고 서러운 이들이 생겨난다.

그래서 적당히 모여 살기로 한다면 몇명이 가장 적당할 것인가? 꼬뮨에 대한 고민의 맨 처음은 공동체의 물리적 크기를 고민하고 그를 통제할 방안을 모색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꼬뮨은 그 합목적성을 이루기 위해서 특정한 조건들을 만족시켜야 한다. 예를 들어서 내부의 창조적 자산이 상속되어서 내려오면서 공유 심화 발전되어야 한다든가, 사회적 갈등을 외부적 제도가 아닌 구성원의 합의로 최대한 만족스럽게 해결할수 있어야 한다든가 등이다. 그 이외에도 공동체의 후손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혹은 공동체의 유지는 영속적일 필요가 있는가 등이다. 단계적으로 층위가 낮은 꼬뮨이 종속적으로 존재할 것인가? 아니면 상이한 꼬뮨이 불특정하게 분포할 것인가 등의 문제가 상존한다.

꼬뮨의 크기는 10-20명 정도가 적당하다. 그 정도면 집중된 노동력으로 높은 생산력을 가질수도 있을 뿐더러 과도한 분업으로 인한 노동 소외 현상을 야기하지도 않는다. 꼬뮨의 구성원은 연령과 성별, 직능 등이 다양해야 하지만 가치관과 종교, 성적 취향, 언어 등이 과도하게 상이하면 유지가 어렵다.

지속적인 노마드의 방문 없이는 꼬뮨은 고립되고 부패할 것이다. 노마드는 항시 상존하는 2-10명이 적당하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10-20명이 살면서 2-10명의 노마드를 끝없이 받아들일 여력은 있는 공간에서 2-4 가족 꼬뮨이 살아야 한다.

오늘의 고민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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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iggymother 트랙백 0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