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학교에서 배운 민주주의라는 것은 하나의 대상에 대해서 상이한 의견이 있을때, 가장 불만이 적은 결과가 나올수 있도록 조율하는 방법이었다. 그것은 아이를 반으로 갈라서 어미들에게 나누어 주는 결과적 평등이 아니라, 현재의 시점에서 가장 큰 미래의 열매를 위해서 지금 먹을 양식을 씨앗으로 삼을수 있는 과단성과 그 판단을 모두에게 설득하는 과정 모두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의미로서의 민주주의를 대한민국에서 찾는다는 것은 힘든 일이 되었다. 김대중 정부에서 과도기를 거친 민주 정권은 노무현 정부에서 그 탄력있는 운용의 묘를 상실했다. 반대파를 을러가고 달래가며 끌고 나가는 힘보다는 지금 정권을 차지했다는 자만이 얼굴에 그득했다. 한 그릇의 밥을 가장 힘센 놈에게 먹여서 더 키우겠다는 자본주의의 생각은 근본적으로 민주주의와 대립할수밖에 없다는 것이 하나의 원인이기도 하지만, 아직도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그 교집합 내에서 할수 있는 것이 남아 있다는 것이 나의 미련이었다.
FTA 협상 과정의 밀실 민주주의에서는 사회적 합의와 양보의 힘이 질식했다. 뒤이은 대선에서는 공공의 이익을 위한 논의와 미래를 위한 청사진 대신에 물신의 힘이 대선판을 휩쓸었다. 미제국주의가 이식한 기형적인 기독교가 자본주의와 결합해서 '돈과 하느님을 동시에 섬기는' 기형적인 형태의 물신교가 등장했다. 그것은 얼핏 실용주의와 경제 성장의 가면을 쓰고 있지만, 실상은 50년의 유구한 전통을 가진 독재 정권의 진화물이었고 그 자식이었다. 연좌제가 통하지 않는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아버지의 죄를 자식이 갖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아버지와 동일한 유전자를 가진 자식이 아버지의 유산을 그대로 물려받는데 있어서 상속세를 내지 않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현재 한나라당이 품고 있는 보수 세력은 그러한 역사성에서 스스로를 외면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권력에 기생한 매판 언론들의 더러운 협조가 긴밀하게 이루어져 왔기 때문에 성공한 것도 큰 몫을 했다. 그들은 과거의 죄를 저지른 것에 대한 한마디 언급이라도 있어야 했다. 아니면 적어도 자신들이 그러한 세력으로 변절하여 편입한 것에 대한 자기 변명이라도 필요했다. 그러나 조금의 언급이나 귀띔도 없이 그들은 변신했고, 규제 철폐와 경쟁력 강화만을 외치며 우리 시대의 다수에게 탈락자의 수모를 안겨주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민주주의, 그놈의 잘난 민주주의라는 메카니즘이 조금이라도 움직였다면, 공공의 장에서 허심탄회한 토론이 당사자들 간에서 이루어지고 지금보다는 조금이라도 나은 결과가 나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민주주의의 껍질을 쓰고 대중들을 자신의 설득의 대상으로 동원했다. 그리고 그 설득은 이명박이 당선될만큼만 성공적이었다.
특정한 주제가 있으면 공청회를 연다. 그리고 반대의견이 나오면 무시한다. 그러나 공청회를 열었다는 사실 근거 자체가 설득을 위한 논거가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명박 정부의 어떠한 제안에도 참여하는 것 자체가 이명박 정부의 논거를 돕는 이중대의 역할만을 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아름다움은 이익을 떠나서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모두가 한마디쯤 말할수 있는 광장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지금 광장은 장사꾼으로 가득차서 모두가 이 광장에서 이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자신이 가진 잡동사니를 팔아볼수는 없을까 혈안이 되어있다.
민주주의는 다시금 현장에서 광장의 포석을 까는 것에서 시작한다. 대운하를 찬성하는 사람들은 대운하로 인해서 얻어질수 있는 자신의 천박한 배금 논리를 걷어버리고 솔직한 바탕 위에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테솔로 인해서 막대한 이득을 누리고 있는 숙명여대의 총장이라는 자가 지껄이는 영어 몰입 교육의 논리가 더러운 기반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민주적 논의가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이명박 정부가 대변하는 자들의 논리는 그들의 이익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근본적 설득력을 잃는다.
다시금 무엇으로부터도 자유롭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의 솔직한 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민주주의의 재구성은 민주주의에 참가할수 있는 자들의 자격에서 시작한다. 과거 그리스 로마의 민주정이 내국인 남성 귀족으로 제한되었다면 현재의 민주주의에 참가할수 있는 자들은 노동자 서민이다.
신전의 장사꾼들에게 채찍을 내려치며 노할 수 있었던 예수가 부럽다.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 허울 좋은 거짓신과 자본주의를 겸해서 섬기는 이단자들에게 불의 철퇴를 내려치고 싶은 심정이다. 그 바리새꾼들의 수장이 바로 이명박이다. 더러운 무한경쟁 물신율법의 노예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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