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7살이었고, 밀양의 조그만 국민학교(초등학교를 당시에는 국민학교라고 불렀다.) 부속 유치원을 최우수로 졸업하여 기고만장하여 있던 시절이었다. 난 유치원 30명의 누구보다도 똑똑했고, 덩치가 컸고, 책을 빨리 읽었고, 목소리가 컸고, 부모님이 키우고 있는 오리는 150마리가 넘었다.

난 모든 것이 우수했고, 그래서 항상 건방졌다. 어른들이 날 칭찬해주는 것도 당연하게 생각했고, 어머니가 받아쓰기 100점 받았다고 좋아해 주는 것도, 아버지가 크고 거친 손으로 안아올려서 비행기를 태워주는 것도 나에게 응당히 주어져야 하는 댓가라고 생각했다.

국민학교에 입학하니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난 더럽고 갈라진 나무합판으로 만들어진 교실에서 하루에 4시간이라는 긴 시간을 보내야 했다. 한주는 오전에, 한주는 오후에 학교에 와서 60명이 가득찬 미어터진 교실에서 선생님이 외치는 소리를 끝도없이 짹짹 따라하지 않으면 금방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공부는 어려웠고 양이 많았다. 읍내의 나보다 때깔이 좋고 얼굴이 하얀 친구들은 국민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이미 'ㅃ'이라든가 'ㅊ'과 같은 어려운 글을 쓸줄 알았다.

나의 기고만장함은 입학한지 1주일이 되어 무참하게 깨지고 말았다. 선생님은 굉장히 중요한 것이라고 몇번을 강조했고, 난 바짝 긴장하여 선생님이 하는 말을 들었지만,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선생님은 숫자만을 되풀이해서 계속 말했고, 난 그 나열되는 숫자에 무슨 규칙이 있는지 도무지 알수가 없었다. 2가 2개 있고, 2가 3개 있고, 2가 4개 있는 것이 난 각각 따로라고 생각했고, 왜 그것들이 일정한 법칙에 따라서 나열이 되는지 알수 없었다. 아니, 난 그전에 곱셈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수가 없었다.

4시간이 지나고 다른 급우들은 모두들 3단까지 선생님 앞에서 종알거린 후에 집에 갔지만 난 멍청히 앉아서 무엇을 해야할지 몰랐다. 그저 하나둘씩 집으로 가는 급우들의 바지런히 깍인 뒤통수를 쳐다보고, 비듬이 껴있는 나의 뒤통수를 긁다가 입에 넣어 손톱에 낀 비듬을 긁어낼 뿐이었다.

그때만 해도 긴장감과 수치심은 덜했다. 나처럼 남아 있는 아이들이 3명 더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들이 개별지도 후에 금방 알아듣고 3단까지 외운후 집에 모두들 가버릴때까지 난 아무것도 모르고 앉아서 머리를 긁어댈 뿐이었다.

혼자 남아서 선생님이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앉아있는 것은 고역이었다. 난 그때 내가 구구단을 과연 이해했는지, 아니면 아줌마 선생님이 그냥 포기하고 날 집에 보내주었는지 기억이 뚜렷하게 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것은 집으로 걸어가는 어둑어둑한 그 길에서 홀로 처절하게 느낀 외로움과 수치심, 날이 벌써 어두졌다는 두려움, 모두가 아는 것을 나만 몰랐다는 부끄러움, 이 사실을 부모님이 알게 하면 안된다는 생각 뿐이었다. 항상 웃으면서 날 안아주던 어머니는 내가 반에서 제일가는 백치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날 그전처럼 사랑하지 않을 것이었다. 난 두려움과 수치심으로 멍하니 집으로 걸어갔고, 동네 어귀에서 조그맣게 열려있는 대추나무에 몸을 기대고 파르라니 덜익은 대추를 소매에 문지르지도 않고 씹어삼키며 울먹였다. 언제인지도 모르게 4살부터는 싸지 않았던 오줌까지 싸서 바지 앞섶이 젖어있었는데, 난 그것도 알지 못했다.

동네 아주머니가 날 발견했다. 그네는 나의 엉덩이를 치면서 내가 크게 울음을 터뜨리도록 기다린 이후에 날 안고 집에 데려다 주었다. 당시 지금의 나와 나이가 비슷했던, 그때만 해도 20대 후반이라서 얼굴이 맨들맨들했던 어머니는 날 업어주며 '괜찮다......괜찮다......어디 있다가 왔나?' 를 주문처럼 읆조리면서 날 업고 좁은 마당을 한 바퀴 돌았다. 강아지가 끙끙대면서 어머니의 발목에 달라붙으려고 했지만, 어머니는 강아지는 안중에도 없어서 강아지가 낮게 '깽'하는 소리를 내면서 넘어지도록 발로 살짝 차버린 이후에 계속 날 업고 마당을 돌았다. 형이 문을 열고 날 멍하니 바라보고, 아버지가 나와서 날 안아올리기 전까지 난 학교에서 구구단을 가르쳐주었는데 난 이해하지 못해서 지금까지 외우다 왔노라고 말할 용기가 없었다. 난 더 크게 울었고, 눈물과 콧물과 오줌이 범벅이 되었다.

그 어린 나이의 수치심과 좌절의 경험이 아직도 내 안에 남아 있다. 난 내가 이해하지 못하고 남들이 이해하는 문제를 만날 때마다 얼굴이 붉어지고, 좌절감과 수치심과, 나만이 뒤떨어졌다는 생각에 울고 싶은 기분이 들곤 한다. '우리는 다 이해하는데, 넌 왜 모르니?' '우린 다 알았는데 넌 왜 뒤쳐져 있니?' 라는 얼굴로 날 쳐다보는 사람들을 모르는 척 하면서 나의 삶을 꾸리는 것은 지금도 힘들고 여전히 두려운 일이다. 특히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그러할 때면 더욱 그렇다.

어제 대선 방송을 보면서 내내 그런 기분이었다. 고향 마을의 촌로들이 태극기를 들고 막걸리를 기자에게 권하며 불콰해진 얼굴로 '대한민국 만세'를 외칠때 난 그들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난 친구와 둘이서 깨끗이 정돈된 나의 방에서 TV를 보면서 어린 시절의 수치심과 좌절감을 다시 느꼈다.

그가 당선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현실로 다가왔을 때의 시무룩함은 나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이러나저러나 그만이 당선될 수밖에 없는 정치공학적 계산을 떠나서 난 내가 걱정이 되었고,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그들의 기쁨과 환호가 어디서 기인했는지 난 잘 모른다. 내가 오로지 아는 것은 부패한 후보는 가장 무능하며, 그런 자에게 정치적 대리권을 넘긴 국민들에게 그 책임은 부메랑이 되어서 어떤 식으로든 다가올 것이라는 것이다. 허세로 가득찬 경제 호황의 거품이 가신 후에 양극화와 물신주의의 건더기가 떠오르면, 그것을 독식하는 자들은 누구가 될런지는 모르겠지만, 그에게 표를 던진 사람들 중의 대다수는 그에 포함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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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iggymother 트랙백 0 : 댓글 8